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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시각장애인 및 비장애인부문 대상 - 너에 대하여 (이소현)
   날짜 : 18-10-11 11:19     조회 : 598    
#비시각장애인 및 비장애인부문 대상

너에 대하여
-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준 너에게
이소현

그림자 아래로만 다니는 느낌, 딱 그 정도 느낌이야.

언젠가 내가 조금 다른 시야에 대해 물어봤을 때 너는 담담한 얼굴로 그림자 사이를 걸어 다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림자. 네가 말한 그림자의 높이가 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깊은 구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나는 어리숙하게 웃었다. 그건 어쩌면 너를 받아들이지만 온전히 책임질 수는 없다는, 그런 구석진 마음의 이야기였는지도 몰랐지만 어린 발걸음으로 쉽게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나눴다. 찜찜함의 무게를 재기에 나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에 처음 발을 내딛던 날, 아직 추운 날씨에 입김은 피어올랐지만 설렘은 동장군의 칼날을 가볍게 받아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걱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시끌시끌한 친구들의 웃음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교생 200여명의 시골 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한 학년만도 200명이 넘는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신세계를 마주한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다들 친구 사귀기가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너와 나는 퍽이나 빨리 친해졌다. 꽤 이른 시간에, 아직 많은 학생이 오지 않았는데 맨 앞자리 그것도, 가운데 자리에 앉은 너를 나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으면 머쓱해질 것 같아 네 옆에 앉은 건 운명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퍽이나 빨리 가까워졌다. 그건, 서로의 학교에서 진학한 친구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았지만 왜인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그런 알 수 없는 동질감. 동시에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이질감도 느껴졌다. 어딘가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마음의 소리. 사실 그 이질감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 나를 바라보지만 헛도는 눈동자. 지나치게 가까운 책과 눈의 거리. 매일 맨 앞자리에 앉아도 흐릿한 글씨와 찌푸리던 미간. 항상 어색한 얼굴로 지나간 필기를 나에게 묻는 너를 보며, 나는 금세 너의 문제를 알아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결국 떨리는 눈동자로 꼬깃꼬깃 접힌 너의 비밀을 풀어놓았다. 어릴 때 눈의 신경이 다쳐 한쪽 눈은 보이지 않고, 다른 한 쪽 눈은 거의 흐릿하게 보인다며, 안경을 쓰지 않으면 그나마도 보이지 않는다며 두꺼운 안경을 보여주는 너는 어쩐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친한 친구에게 내보인 약점에 대한 걱정. 사실 그동안 쏟아지는 반응에 대한 울음 대신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매번 앞자리에 배정되는 너의 자리를 보며 성적에 예민한 친구들은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정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하고는 했고,

너 어디 봐?

라며 대화중에 툭, 차가운 말을 내뱉는 친구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친할 수 있었던 건, 나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퍼거증후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남들처럼 많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한정된 감정을 남들보다 쉽게 분출해내는 정신장애. 중학교를 거치며 꽤 많이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런 증상이 조금 있던 나에게 어쩌면 너는 가슴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의 비밀에 대해, 그리고 너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너의 눈이, 너는 나의 마음이 되어주었으니까.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인 우리는 꽤 즐거웠다. 맨 앞자리는 언제나 너의 고정석이었고, 옮겨 다니는 것은 나의 몫이었지만 내가 힘든 순간에 옆에 있던 것은 너였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쪽은 너였고, 그런 너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림자, 그 그림자가 단지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나의 기우였을까. 왜인지 모르게 네가 불쌍할 것이라 단정 지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너는 밝았고, 빛이 났다. 불쌍한 쪽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던, 그런 내가 어설프고 어렸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함께 공부했고, 함께 자랐다. 수행평가를 위해 영화관에 갔을 때, 장명을 끊임없이 설명한 것은 나였지만 미술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이야기들을 쉽게 설명해 준 것은 너였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했다. 물론 다 큰 우리였지만 조금씩 성숙해진 것은 너를 통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3학년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같은 길을 걸으며 나는 정상 판정을 받았고 너는 눈 수술을 받았다. 한 쪽은 소생불가였지만 다른 한 쪽은 조금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희망찬 대학을 꿈꿨고, 결국 서로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그것이 같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너와 나는 언제나, 서로의 가슴에서 살아갈 것이었으니까.

대학에 와 힘든 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너를 떠올려. 네가 알려준 가슴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에 대해. 우리의 눈은 투영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마음은 투영된 것을 아니, 투영되지 않은 것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의 그림자는 어두운 그림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는 한 걸음 뒤에서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간 뒤편의 풍경을 봐주는 곳이었을까. 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 연락한 너는 꽤나 밝은 목소리로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지금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수 있기를. 언제나 현재가 아름답기를 너의 세상도, 조금은 흐릿하지만 언제나 빛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너에 대하여,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