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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 부문 대상 - 열우물 버들아래(김인주)
   날짜 : 18-10-11 11:01     조회 : 739    

#시각장애인 부문 대상

열우물 버들아래
김인주

오랜만에 만난 햇살이 반가워 아껴두었던 홍차 잎을 우려내 창가에 어색하게 다가섰다. 떠밀리듯 이사 온 낡은 아파트는 아직도 남의 집 마냥 낯설다. 창문 밖 넘어 멀리 보이는 가파른 언덕의 건물들이 연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이다. 봄 들녘의 아지랑이 같은 뿌연 먼지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먼지처럼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 속 홍차는 그리운 붉은 벽돌색을 옮겨다 부어놓은 것만 같다. 뜨거운 찻잔을 살살 돌려 떠오르는 찻잎이 가라앉기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본다. 이내 입 안 가득 따스한 쌉싸름함이 퍼진다. 그리움이 진하게 퍼져온다.

언덕 위 꼭대기 집을 내 나이 일곱 살에 처음 발을 디뎠다. 시골에서 맨주먹으로 상경한 부모님께서는 단칸방과 월세방을 전전하며 궁색하리만큼 아껴서 만들어낸 집이었다. 이젠 집주인의 눈치 보지 않고 마당을 달리고 놀아도 되었다. 화장실도 집 안에 있어서 추운 밤 울며 언니를 깨울 일도 없어졌다. 높은 언덕길 따라 하루하루 여러 채가 다투어 들어섰다. 그 중 언덕 제일 위에 있는 붉은색 벽돌 모퉁이 집이 나의 보금자리였다. 아버지께서는 마당 한쪽 좁은 화단아래 포도나무 한 그루를 심었고, 줄을 기둥아래 달아두고 포도나무 가지가 잘 올라가게 매어두셨다.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처음으로 포도가 열리기 시작했다. 긴 줄 따라 포도송이들이 하늘에 알알이 달렸다. 밖에서 놀다가 마당을 지나갈 때면 까치발 세워 손을 뻗쳐 닿을 수 있는 곳의 포도 한 알을 입에 몰래 털어 넣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배가 요란하게도 꾸륵꾸륵했다. 어머니께서는 설익은 포도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며 어린 딸의 배를 동글동글 어루만져 주셨다. 매미의 요란하게 우는 소리도 귀안에 맴돌다가 아련하게 들릴 때 즈음 아픈 배도 스르르 사라지고 잠에 빠져들곤 했다.

모퉁이 집은 다른 집들과 달리 등대고 있는 두 집을 이어주듯 마름모 모양으로 지어진 특이한 구조였다. 여느 정사각형 집과 달라 모퉁이 집을 철없이 자랑거리라 우기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놀림거리이길 일쑤였다. 모퉁이 집은 나 같았다. 난 어려서 왼쪽 시력이 약해져만 갔고 부모님께서는 당시 엄두도 못 낼 치료비와 고쳐도 말끔히 나을 수 없다는 걱정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으셨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듯 나의 왼쪽 시력은 결국 떠나버리고 말았다. 남들과 다른 모양의 모퉁이 집처럼 난 모두에게 조금은 다른 모퉁이 아이가 되었다.

철부지 아이들이라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을 꺼내진 않았다. 순수함에 상처를 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시력차이로 제멋대로 돌아가는 눈을 보고 사팔뜨기, 애꾸눈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꺼내 마음을 베어냈다. 짓궂은 아이들이 있어도 그래도 난 이 동네가 좋았다. 동네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별명 같은 이름이 있었다. 지금은 십정동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열우물이라 불렸다. 우물 열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열우물이라 했다. 아랫동네 아이들이 놀러 와서 장난이라도 치는 날이면 상처 주던 열우물 아이들도 우물물 같아졌다. 각각 다른 열 개의 우물물도 한 두레박씩 퍼 섞어놓으면 하나의 물과 다르지 않듯 금세 하나가 되어 서로를 보듬어주었다.

아직 비포장도로와 아스팔트 도로가 섞여있는 열우물 버드나무 주위로 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파란색 줄무늬 바탕의 하얀색 글씨로 쓰여진 간판은 하나같이 버드나무라 지어졌다. 버드나무 이발소, 버드나무 전파사, 버드나무 슈퍼...... 학교가 끝나면 이곳의 열우물 아이들은 문 앞에서 연신 친구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시계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알아듣곤 그들만의 아지트로 찾아갔다. 그렇게 모이는 곳은 마을 중턱에 있는 버드나무 아래였다. 제일 가까이 있는 슈퍼에는 손님을 위한 평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변변한 놀이터도 없는 열우물에선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봄철이 되면 버드나무가 꽃비 내리듯 잎을 흔들어댔다. 분명 겨울도 아닌데 하얀 눈이 내리듯 신기했다. 아이들과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 버드나무는 더 몸을 흔들어 꽃비를 내려주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날엔 어김없이 친구 한두 녀석은 눈병이 걸려대기 일쑤였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하루하루가 쌓여 계절이 바뀌어 국민학교에서 오전 오후반으로 수업 받던 열우물 아이들은 졸업과 함께 시내 이곳저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내가 아는 제일 먼 거리의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내가 입학을 하던 그해 처음으로 촌스러운 체크무늬 치마와 때도 잘 가지 않는 블라우스를 입고 사춘기의 시절을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 같은 학교에 배정받은 열우물 아이도 없었다. 홀로 버스를 타러 큰길까지 내리막길을 걸으며 모퉁이 집이 최고라 우기던 철없던 아이는 가난에 달동네로 밀려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도 모르게 한 뼘 즈음 자란 모퉁이 아이는 귀밑 단발머리 또래 아이들과 종달새 마냥 떠들며 어울리기보단 이유도 알 수 없이 메케한 냄새가 퍼져 수업을 일찍 끝내주던 날이면 낡은 서점을 찾아가길 더 좋아했다. 거리는 멀어도 동인천에 가면 오래되고 재미있는 책이 한가득 있는 중고서점이 많이 있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책장들에는 한자 가득한 고서적부터 일본에서 넘어온 만화책까지 없는 책이 없을 정도로 신기한 곳이었다. 서점 아저씨는 다 읽은 책을 가져와 돈을 조금 얹어주면 다른 책으로 교환을 해주셨다. 그렇게 읽어 내려간 책은 모퉁이 아이의 혼자만의 시간을 짧게만 느껴지게 만들어주었다. 책속에서는 모퉁이 아이를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모든 것을 해내는 원더우먼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멀고 먼 거리를 걸어 버스표를 아껴 책으로 바꿔 읽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래된 향기 가득 벤 책을 들고 버드나무 평상에서 앉아 까끌거리는 기둥에 기대어 나뭇잎 사이로 비춰진 햇살이 살짝살짝 얼굴로 비춰져 눈을 감았다. 살랑이는 바람에 햇살이 비춰주니 버드나무가 모퉁이 아이의 마음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모퉁이집 아랫동네엔 어느 샌가 아파트가 생겨났다. 언덕 아래 전철역근처에는 10층이 넘는 건물도 올라왔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디오가게나 방앗간, 만두가게, 국수가게들이 점점 사라졌다. TV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 오랜 추억의 장소로 모퉁이집 근처에 와서 촬영들을 해댔다. 관광명소마냥 사람들이 찾아왔고 어렵던 시절 장소로 등장하는 모퉁이 골목 여기저기는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젊은 사람들 몇 명이 빈 가게 하나에 페인트를 색색이 가득 채워 집집마다 그림을 그려 넣어 따스함을 칠하기 시작했다. 공부방 자리에도 예쁜 그림을 넣었고 꽃그림 바다그림이 담장과 계단을 채워 넣었다. 시멘트로 흙바닥을 발라버린 버드나무에게도 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림의 온기는 거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더디고 더뎠던 재개발이 확정이 되자 제일 먼저 시멘트 바닥에 뿌리를 박아둔 버드나무를 사람들은 무참히도 베어버렸다. 시멘트아래 가둬둔 후 옮겨 심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요란히도 울리는 전기톱소리와 함께 버드나무가 넘어지면서 땅을 울렸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늘 위로가 되었던 버드나무가 없어지고 밑둥만 남은 것을 보고 모퉁이 아이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그렇게 열우물 아이 가족들이 하나 둘 떠나고 우리 가족도 모퉁이 집이 내어준 돈으로 오래되었지만 편리하다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창가 쪽 한 자리에는 방석을 놓았다. 그 자리의 창가에서는 모퉁이 집과 버드나무 터가 잘 보였다. 나 같아서 그렇게 싫어했는데, 지금은 모퉁이집이 무척 그리워진다. 모퉁이집이 너와 같은 나를 버리고 간다며 미워할는지도 모르겠다. 모퉁이집은 대문방향이 달라서 다른 집과 달리 이상한 구조의 긴 담벼락이 있듯이 나의 왼쪽 눈은 남들은 알 수 없는 뿌연 색의 특별한 세상을 보여준다.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고플 때는 왼쪽 눈만 살짝 떠본다. 열우물 버드나무 아래는 늦은 저녁까지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마저 보이는 듯하다. 모퉁이여서 길 가던 자전거나 골목사이에 주차하는 자동차들에게 쿵쿵 많이도 부딪치며 서 있던 모퉁이의 단단했던 담벼락과 슬픔을 나눠받아 줬던 버드나무는 사라져버렸지만 모퉁이 아이의 왼쪽 눈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흐렸던 하늘 사이로 햇살이 창가로 스미어 비워진 홍차 찻잔이 반짝였다. 기대어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실로 향하다 뒤를 바라보곤 남겨진 방석을 들고 거실 의자에 앉았다. 왼쪽 눈에 담겨진 소중했던 기억을 한 글자 한 글자 따스함에 더해 적어 내려갔다. 열우물 버들 아래......